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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아일보> 양반은 ‘∼氏’ 중인은 ‘∼姓’ 평민은 ‘∼召史’… 작성자 한구타밀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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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양반은 ‘∼氏’ 중인은 ‘∼姓’ 평민은 ‘∼召史’…
 


<동아일보>에서

양반은 ‘∼氏’ 중인은 ‘∼姓’ 평민은 ‘∼召史’… 조선시대 기혼녀 호칭, 신분따라 달랐다

기사입력 2014-02-25 03:00:00 기사수정 2014-02-25 09:24:29

권내현-차재은 교수 논문 ‘17∼19세기 여성의 지칭어 변화’

조 선시대 기혼 여성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던 ‘씨(氏)’나 ‘성(姓)’ ‘소사(召史)’는 호적대장 같은 문서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에서도 널리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의 신분이나 직역 변화에 따라 아내의 호칭이 일생 동안 여러 번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19세기 후반 평민 기혼 여성들이 맷돌질을 하는 모습을 그린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관노(官奴)인 기생의 딸로 태어나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나눈 ‘춘향전’의 주인공 성춘향. 만약 춘향과 몽룡이 실존인물이고 결혼에도 성공했다면 이몽룡 집안의 호적에는 그 기록이 어떻게 남아 있을까?

법적으로 노비 신분인 춘향이는 호적상에 이름과 함께 천첩(賤妾)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춘향이가 양반가의 딸이나 평민 집안의 딸이었다면 호적상 기록이 달라진다. 춘향이라는 이름은 빠지고 각각 ‘성씨(成氏)’나 ‘성소사(成召史)’라고만 적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이처럼 기혼 여성을 칭하는 말이 신분에 따라 달랐다. ‘민족문화연구’ 최신호에 실린 권내현 고려대 교수(역사교육학)와 차재은 경기대 교수(국문학)의 논문 ‘17∼19세기 여성의 지칭어 변화’에는 기혼 여성의 신분을 가늠케 한 호칭에 대한 분석이 담겨 있다.

양반가를 중심으로 한 상류층 기혼 여성은 성 뒤에 ‘씨(氏)’라는 호칭을, 평민층은 ‘소사(召史)’, 향리와 중인을 위시한 중간층은 ‘성(姓)’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이름을 소중히 여겨 사적 공간 외에서는 자(字)나 호(號)로 이름을 대신했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들 역시 최하층 노비나 미혼 여성 말고는 일상생활이나 문서에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

차 교수는 “재판장에서도 여성이 서로를 ‘김소사가…’나 ‘박소사는…’ 하고 불렀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으로 볼 때 이런 호칭은 문서상의 기록 외에 입말로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호칭은 주로 남편(남편 사망 시 아들)의 신분이나 직역(직업의 영역이나 범위)에 따라 변했다. 남편의 신분 변동으로 평생 동안 호칭 변화를 여러 번 겪는 여성도 많았다. 논문에 언급된 경상도 단성현(오늘날 경남 산청군) 도산면에 살았던 평민 남성 김광오의 부인은 1759년 이소사(李召史)로 불리다가 3년 뒤 남편의 직역이 중간층인 ‘업유(業儒·유학을 닦는 서자)’로 상승하면서 이성(李姓)으로 바뀐다. 1780년 남편이 상류층인 ‘유학(幼學·벼슬 없는 유생)’이 되자 이씨(李氏)로 불리다가 1783년 남편이 중간층 ‘교생(校生·평민 출신으로 향교에 다니던 생도)’으로 신분이 낮아지자 다시 이성(李姓)으로 내려갔다.



논 문이 조사대상으로 삼은 단성현의 경우 ‘∼씨’로 불린 여성은 1678년만 해도 전체 기혼 여성의 12.4%에 불과했다. 하지만 1789년에는 그 비율이 40%, 1860년에는 80.5%까지 치솟았다. 조선 말기 신분제의 동요로 스스로를 유학이라 칭하는 남성이 늘었고 노비들도 대거 해방되면서 기혼 여성의 지칭어도 ‘씨’로 빠르게 수렴된 것.

반면 1678년 각각 22%와 65.4%였던 소사로 불린 여성과 이름을 쓰는 여성은 1860년 각각 4.7%와 1%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16, 17세기 하나의 계층으로 자리 잡은 중인들이 스스로를 평민층과 구분 짓기 위해 18세기 중엽부터 쓰기 시작한 ‘성’도 19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사용비율이 크게 낮아졌다.

때로는 여성의 호칭 상승이 남편이나 아들의 신분 상승보다 먼저 일어나기도 했다. 권 교수는 “이는 가문 전체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성의 지칭 변화를 먼저 시도한 사례로 보인다”며 “훗날 남성의 신분이나 직역을 기재하지 않아도 되는 근대적 호적제도의 시행과 함께 여성들도 자신의 이름을 공적 영역에서 드러내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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