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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간조선] 둔황 막고굴의 고대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작성자 한구타밀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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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둔황 막고굴의 고대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주간조선] 둔황 막고굴의 고대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 이선민 조선일보 선임기자

  • 입력 : 2013.07.18 10:50 | 수정 : 2013.07.18 11:04

    
	(왼쪽부터) 막고굴 98굴의 백라관을 쓴 고구려 국왕. 막고굴 85굴의 조우관 인물상. 막고굴 85굴의 청라관을 쓴 고구려 대신.
    (왼쪽부터) 막고굴 98굴의 백라관을 쓴 고구려 국왕. 막고굴 85굴의 조우관 인물상. 막고굴 85굴의 청라관을 쓴 고구려 대신.
    중국 간쑤성(甘肅省) 서쪽 끝에 있는 둔황(敦煌)은 동·서양 문명교류의 통로였던 실크로드의 거점도시이자 동양 고대문화의 보고(寶庫)로 유명하다. 198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둔황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중국 3대 석굴’의 하나로 꼽히는 막고굴(寞高窟)이다. 둔황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5㎞쯤 떨어진 명사산 동쪽 벼랑을 따라 1600m에 걸쳐 조성된 492개의 석굴에는 엄청난 분량의 벽화와 불상·조각·고서화가 들어 있어 찾는 사람을 감탄하게 만든다.

    주로 불경(佛經)을 소재로 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벽 위의 도서관’이라고 불리는 막고굴 벽화는 누구에게나 흥미롭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인 관람객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는 그림이 있다. 모자에 새의 깃털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을 쓴 ‘고대 한국인’의 모습이 담긴 벽화들이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 사람은 새의 깃털이나 그 모형을 모자에 부착했고 외국에 가는 사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은 조우관을 고대 한국인의 상징처럼 생각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이런 사실이 기록돼 있다. 쌍영총과 무용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조우관을 쓰고 말을 달리는 모습이 등장한다.

    막고굴의 조우관 인물상은 그동안 6~7점 정도가 알려졌다. 그중 가장 많이 소개된 것은 335·332굴과 220굴이다. 335·332굴에는 문수보살과 유마거사가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조우관을 쓴 사람이 두 명 등장한다. 깃이 둥글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새 깃털 두 개가 꽂힌 푸른색 모자를 쓰고 있는 이들은 서로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335굴과 332굴의 조우관 인물상은 같은 화가가 그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림의 구도가 비슷하다. 220굴에는 조우관을 쓴 인물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159굴과 138굴에도 조우관을 쓴 인물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또 2001년에는 소설가 정찬주씨가 둔황을 답사한 뒤 막고굴 237굴과 9굴에서 조우관을 쓴 인물상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237굴의 조우관 인물상은 매우 젊고 세련된 모습이다. 정씨는 “외교관이라기보다 화랑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청년 얼굴”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한국인의 관심을 끌어온 둔황 지역의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수십 점이나 추가로 확인돼 관심을 끌고 있다. 중국 둔황연구원의 리신(李新·44) 연구원은 지난 7월 5~6일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경상북도 주최, 동국대경주캠퍼스박물관 주관으로 열린 ‘제2회 경주 실크로드 국제학술회의’ 발표를 통해 “막고굴·유림굴·서(西)천불동 등 둔황 지역의 40개 석굴에서 고구려·백제·신라·고려인이 그려진 그림을 확인했다”며 그중 일부를 공개했다. 리 연구원이 막고굴과 인접한 유림굴(42개), 서천불동(17개) 등 500개가 넘는 둔황 지역의 석굴을 10여년 동안 조사한 결과 막고굴 38개, 유림굴과 서천불동 각 1개에서 고대 한국인 인물상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리신 연구원이 확인한 고대 한국인 인물상은 39개의 석굴에서 나온 조우관 인물상과 막고굴 61굴의 ‘오대산도(五臺山圖)’에 들어있는 4점의 그림으로 나눌 수 있다. 조우관 인물상이 들어 있는 그림은 불경의 내용을 쉽게 그림으로 풀어 설명하는 경변도(經變圖)이다. 경변도에 그려진 설법을 듣는 대중 중에는 중국뿐 아니라 인접국의 왕과 사신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조우관을 쓴 모습이 보인다. 리 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조우관 인물상이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유마힐경변도’로 모두 29개이고 ‘열반경변도’가 7개, ‘범망경변도’가 3개이다.
    
	 (좌) 막고굴 121굴의 고구려인상. (우) 중국 당나라 고종의 아들 이현의 무덤에서 나온 ‘예빈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조우관을 쓴 신라 사신이 보인다.
    (좌) 막고굴 121굴의 고구려인상. (우) 중국 당나라 고종의 아들 이현의 무덤에서 나온 ‘예빈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조우관을 쓴 신라 사신이 보인다.

    ◇고대 한국인 모습, 둔황 벽화 외에도 중국과 중앙아시아 여러 곳에서 확인

    조우관을 쓴 고대 한국인의 모습은 둔황 벽화 외에도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중국 난징(南京) 박물관에 소장된 ‘양직공도(梁職貢圖)’에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양나라를 방문했던 백제 사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사신이 조우관을 쓰고 있다. 1971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박물관이 발굴한 당나라 고종의 여섯째 아들 이현(李賢)의 무덤에서 나온 ‘예빈도(禮賓圖)’에 그려진 신라 사신도 새 깃털을 꽂은 두건형 모자를 쓰고 있다. 두 개의 그림은 중국을 방문했던 백제와 신라 사신의 실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양직공도’의 백제 사신은 521년에 백제 무령왕이 백제가 다시 강성한 국가가 된 것을 중국에 알리기 위해 파견한 사신이었고, ‘예빈도’의 신라 사신은 삼국 통일 후 점령지 문제를 놓고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등 갈등을 빚고 있던 신라 문무왕이 675년에 화해를 요청하기 위해 파견한 사신이었다.

    1965~1968년 우즈베키스탄 과학아카데미가 발굴한 사마르칸트 북쪽 교외의 아프라시압궁전 벽화에도 두 개의 새 깃털을 모자에 꽂고 허리에 칼을 찬 앳되고 건장한 모습의 외국 사신 두 명이 그려져 있다. 7세기 말~8세기 초에 그려진 이 벽화의 조우관 인물상에 대해 발굴 책임자는 ‘고대 한국의 사절’로 추정했다. 이 사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당나라와 고구려의 갈등,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 등으로 동북아가 긴장에 싸여 있을 때 멀리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보낸 나라는 이 지역을 다스리던 소그드왕과 동맹을 맺고 당을 압박하려 한 고구려라는 해석이 우세한 가운데 신라라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리신 연구원이 조사한 둔황 석굴의 조우관 인물상은 이제까지 알려졌던 통상적인 모습과 다른 것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막고굴 332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유마힐경변도 외에 열반경변도에서도 4폭의 조우관 인물상이 확인됐다. 또 보통 조우관이 두 개의 새 깃털을 모자에 꽂는 데 비해 세 개 또는 네 개의 깃털을 꽂은 조우관이 있었다. 새의 깃털이 아니라 꼬리를 꽂은 조미관(鳥尾冠)도 있었고 흰색 비단으로 만든 백라관(白羅冠), 청색 비단으로 만든 청라관(靑羅冠), 자주색 가죽으로 만든 자라관(紫羅冠)에 새 깃털을 꽂은 것도 있었다. 백라관과 청라관·자라관은 각각 고구려의 왕과 대신이 쓰던 것이다.

    리신 연구원은 조우관 인물상이 대부분 고구려인이지만 백제인도 일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막고굴 335·332굴에 보이는 두 명의 조우관을 쓴 인물 중 바람을 막아주는 옷차림을 한 사람은 추운 지방에서 온 고구려 사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백제 사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모자에 옆으로 내리는 부분이 없는 무후책(無後?)을 쓴 백제 인물상이 여러 개의 석굴에서 보인다고 밝혔다.

    
	 (좌)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궁전의 벽화. 오른쪽 아래에 조우관을 쓰고 허리에 칼을 찬 두 명의 젊은 외국 사신이 보인다. (우) 막고굴 61굴의 초대형 벽화 오대산도에 들어있는 ‘신라왕탑’.
    (좌)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궁전의 벽화. 오른쪽 아래에 조우관을 쓰고 허리에 칼을 찬 두 명의 젊은 외국 사신이 보인다. (우) 막고굴 61굴의 초대형 벽화 오대산도에 들어있는 ‘신라왕탑’.
    둔황 석굴의 조우관 인물상은 고대 한국인의 복식과 생활상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에 공개된 그림은 관모(冠帽)가 다양할 뿐 아니라 의복도 서로 구별되는 경우가 많고 허리띠(막고굴 120굴·454굴), 신발(막고굴 148굴)이 자세히 그려진 것도 있다.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발견된 둔황 석굴의 조성 시기는 당나라 초기(618년)부터 송나라 초기(1035년)까지 걸쳐 있다. 국내에는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가 많지 않아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인 인물상이 자료의 공백을 메워줄 것으로 기대된다.

    둔황 석굴의 벽화에 고대 한국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로 리신 연구원은 고구려·백제 유민(遺民)의 둔황 이주를 들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이후 이들 나라의 유민이 둔황 지역으로 적지 않게 이주했고, 이들이 석굴 조성과 불교 신앙 활동에 참여하면서 석굴 벽화에도 그려졌다는 것이다. 리 연구원은 둔황 문헌을 보면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 둔황 지역에 고구려·백제 계통의 사람이 적지 않게 살았다며 사(似)·천(泉)·채(菜)·구(具)·락(洛)·진(眞)·신성(新城) 등의 성씨를 예로 들었다.

    둔황 석굴 가운데 가장 큰 벽화인 막고굴 61굴의 오대산도(五臺山圖) 안에서 ‘신라왕탑(新羅王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 ‘고려왕사(高麗王使)’ ‘보리지암(菩提之庵)’ 등 고대 한국과 관련 있는 4점의 그림이 확인된 것도 의미가 크다. 막고굴 61굴의 주실(主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는 오대산도는 산시성(山西省)의 유명한 불교 성지 오대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높이가 3.5m, 길이가 13.5m에 이르는 초대형 작품일 뿐 아니라 묘사도 매우 세밀하다.

    
	[주간조선] 둔황 막고굴의 고대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신라와 고려가 중국에 보낸 사절단이 함께 등장

    중국 오대(五代·907~960) 말기에 제작된 오대산도에는 신라와 고려가 중국에 보낸 사절단이 함께 등장한다. 이 작품의 밑그림이 만들어진 시기가 신라(기원전 57~935)와 고려(918~1392)가 공존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오대산도의 오른쪽 아랫부분에 있는 ‘신라송공사(新羅送供使·신라에서 보낸 공양사신)’라는 그림에는 통역원, 사신, 두 명의 관원, 마부 등 신라 사신 일행 5명이 그려져 있고 오른편에는 이들을 맞고 있는 두 명의 중국인 관리가 보인다. 이 그림 왼쪽 아래에 있는 ‘고려왕사(高麗王使)’라는 그림에는 연락관, 사신, 짐꾼 등 3명의 고려 사신 일행과 이들을 안내하는 여관 주인이 그려져 있다.

    두 개의 그림에는 다양한 신분의 고대 한국인이 등장한다. 그들의 복식과 관모는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당시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신라 사절단과 고려 사절단은 관모와 복식은 다르지만 바지는 같은 양식의 흰색을 입고 있어 동질성과 연속성을 보여준다.

    오대산도의 아랫부분에는 ‘신라왕탑(新羅王塔)’이라는 이름의 석탑이 보인다. 그 앞에서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고 오른쪽을 흐르는 시냇물 옆에는 스님이 합장을 하고 짐꾼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몇 년 전 오대산도에 ‘신라승탑(新羅僧塔)’이란 그림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만년에 오대산에 거처했던 혜초(慧超·704~787) 스님의 입적지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지만 정밀 판독 결과 화제(畵題)는 ‘신라왕탑’으로 밝혀졌다. 리신 연구원은 ‘신라왕탑’을 ‘신라의 왕족으로 오대산에서 수행한 승려가 세운 탑’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리고 탑을 세운 주인공을 신라 귀족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7년간 공부하며 오대산을 찾았던 자장(慈藏·590~658) 스님으로 추정했다.

    
	오대산도의 일부인 ‘고려왕사’. 고려 사신 일행과 그들을 맞는 여관 주인이 그려져 있다.
    오대산도의 일부인 ‘고려왕사’. 고려 사신 일행과 그들을 맞는 여관 주인이 그려져 있다.
    오대산도 왼쪽 아랫부분에는 ‘보리지암(菩提之庵)’이라는 그림이 보인다. 흰색 담장과 청색 기와지붕을 한 사원 앞에서 두 명의 속인(俗人)이 가사를 걸친 스님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혜초 스님은 780년 오대산 보리사로 가서 공부하고 번역하며 수행하다 그곳에서 입적했다. 보리사는 그후 퇴락했고, 그 자리에 다시 보리암이 세워졌다.

    추가로 확인된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인 인물상은 양과 질이 모두 뛰어나서 학술적으로나 대중적 관심에서나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 학자의 접근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이 주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중국인 연구자의 개인적 조사에 의한 것이어서 앞으로 전문가들의 검토와 토론을 거쳐야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리신 연구원은 오대산도에 들어 있는 네 점의 그림에 대해서는 2011년 논문을 발표했지만, 다른 그림들은 아직 본격적인 분석을 내놓지 않았다. 이번 경주 국제학술회의에서도 리신 연구원의 발표를 들은 한국 학자들이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다. 어떤 학자들은 리 연구원이 조우관으로 분류한 그림 중 일부에 의문을 제기했고, 다른 학자들은 둔황 문서에 기록돼 있다는 ‘고구려·백제 계통 성씨(姓氏)’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

    또 하나 풀어야 할 과제는 리신 연구원이 고대 한국인 인물상을 확인한 40개의 둔황 석굴 중에서 이번에 공개된 것은 절반이 채 안 된다는 점이다. 나머지를 포함한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인 인물상 전체가 공개되려면 둔황연구원 차원의 결정이 필요하다. 이번 공개도 한 점 한 점 둔황연구원장의 승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와 리신 연구원의 발표는 대규모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경상북도가 마련한 것이다. 경상북도는 간쑤성과 우호협력 협정을 체결하면서 공동사업의 하나로 둔황 석굴의 고대 한국인 인물상을 DB로 만드는 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 계획이 성사되면 우리는 둔황 석굴에서 1000년 이상 잠자고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 전체를 다시 만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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